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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마고지의 영웅 임익순 대령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

글쓴이 : 유럽리포트 날짜 : 2014-01-01 (수) 18:35 조회 : 5474
16. 나의 6.25 맞이

나의 대대의 영특한 중대장들이 명령만 떨어지면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속 연대와의 연락이 불통이 되어버렸다. 나는 우선 연락을 취하기 위해 부대대장을 육본으로 출발하게 했으나 그는 중간에서 돌아왔다. 체신전화를 통해 가장 가까운 대구 3사단과 겨우 연락이 닿았다. 앞서 말했듯, 대구 3사단장은 유사단장의 부친으로 일군 대좌를 지낸 유승렬 장군이었다. 유 장군은 나의 공비토벌작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의 대대는 3사단으로 예속되었고 당분간은 대대장이 독단적으로 작전을 진행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의 작전지시를 받는다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25연대는 나머지 2개 연대를 이끌고 38선을 향해 진격하다 완전히 분산되고 연대장마저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 때 대구역에 25연대 패잔병들이 다수 와있다는 정보를 듣고 장교 한 명을 대구로 보내어 패잔병을 모두 안동에 집결시키도록 했다. 38선에 주둔해있던 대부분의 연대들이 많은 병력을 손실한 상황이었는데 나의 대대는 오히려 병사의 수가 두 배로 늘어났다. 그래서 25연대를 재건하려고 연대장을 찾았으나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경북 춘양 북방지역에 적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사실상 안동에서 동해안까지 국군부대라고는 일개 대대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우선 봉화에도 대대를 주둔시키고 춘양 동쪽 분천으로 출격해서 침입한 적의 유격대 1개 중대를 옥녀봉에 몰아넣은 후 섬멸했다. 적의 다수가 사살되고 포로가 약 60명가량 되었다. 6.25 전쟁 발발 후 최초로 거둔 전과라고 국방부 전사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영월 방면으로 나갔던 장교수색대의 정보에 따르면 적의 5연대가 강원도 영월에서부터 춘양으로 내려온다고 했다. 나는 춘양 북방 요지에 병력을 배치했다. 적들은 춘양과 봉화, 안동, 의성을 거쳐 대구를 공격, 점령할 목적이었다. 그 때 우리 국군은 영주, 죽영과 서부전선인 대전 부근에서 각각 적과 대치하여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만약에 춘양에서 내가 적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상황이 어찌 되었을까. 전쟁의 판도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나의 포위망으로 들어온 적들은 인정사정없이 섬멸되었다. 많은 전과를 올린 것은 물론이고 나머지 적들은 울진방향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당시 춘양전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모 신문기자가 작성한 기사내용을 별도로 첨부한다.

그 때 영주와 풍기 일대에서 8사단 주력이 죽영을 침범해온 적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하룻밤사이에 영주가 함락되고 8사단은 안동으로 이동했다. 나는 봉화와 안동 중간에 있는 높은 고개에서 8사단을 추격하는 적에게 반격을 가했다. 우리가 하룻밤 동안 그 고지를 사수하는 동안 8사단 주력은 안동 외곽에 배치하고 있었다.

나는 날이 밝자 능선 위에 서서 독전했다. 이 때 귀가 찢기는 듯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나의 발아래 1미터 지점에 포탄이 하나 떨어져 바닥에 박혔다. 무심코 들여다보니 젖은 지면에서 뜨거운 포탄이 박힌 탓인지 김만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불발탄이었다. 그것이 터졌더라면 내가 지금 이 회고록을 쓰고 있지도 못할 것이다.

부득이하게 안동까지 후퇴해야했다. 안동에는 고 김홍일 장군이 지휘하는 2군단이 와있었다. 전투력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고급 사령부 건제부대만 창설하면 무얼 어쩌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2군단과 8사단 그리고 그 예하 연대병력은 하룻밤사이 안동낙동강을 건너 후퇴했다. 나의 부대는 안동 외곽 진지에서 적을 저지했다.

때마침 낙동강은 홍수로 탁류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떤 전략으로 배수진을 친 나의 대대를 구하느냐하는 문제는 기적만이 가능했다. 그렇다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처럼 상관이 원망스러울 때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나는 독단적 행동을 허락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작전계획 아니 철수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먼저 8사단에 있는 야포중대를 배속 받았다. 야포라고 해야 60밀리 유탄포로 근거리용 소형 곡사포 정도였다. 그것도 10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라도 활용해야겠기에 강의 남쪽 언덕 뒤쪽에 배치하고 산의 길목 등 요소에는 나의 1개 중대를 매복시키고 주력은 야음을 틈 타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야포로 쉴 새 없이 사격을 퍼부었다.

새벽녘에 나머지 중대를 철수시켰다. 병력을 철수한 후에는 강물이 폭우에 불어난 것이 무척 다행이었다. 다리도 역시 파괴되었다. 강의 범람이 우리에게 시간을 벌게 한 셈이었다. 수일 후 다시 후퇴를 한 우리는 안동과 의성 중간인 단촌 부근의 행로봉에 방위선을 구축했다. 행로봉의 북쪽 편에는 넓은 개활지가 있었는데 적의 진격을 막는 최적의 감제고지였다. 그러나 내가 주둔하고 있던 고지에는 적의 대구경 박격포 탄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대대 OP는 행로봉의 뒤에 있는 고지였으나 나는 최전선 쪽에서 M1 소총으로 응사하고 있었다.

적탄은 협차사격으로 내가 있는 정상을 향해 점차 가까이 다가왔으나 나는 부하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순간 둔탁한 폭음과 함께 커다란 바위가 내려치는듯한 감각이 오른쪽 어깨에 와 닿으며 동시에 머리와 오른뺨을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 아팠다. 옆에 있던 부대대장 허순오 대위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팔의 상박부를 거머쥐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흘러내렸다. 발 아래쪽을 보니 전령병이 이미 숨진 채 누워있었다.

그 때 의성에 있던 2군단과 전화가 가설되어 있었다. 군의관이 나의 부상사실을 김홍일 군단장에게 보고했다. 군단장은 “임 중령을 절대 죽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니 즉시 후송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나는 군의관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산에서 내려와 응급치료를 받았다. 박격포 파편이 심장에서 1센티 떨어진 부분까지 들어가 박히고 콩알 크기의 파편이 뺨을 뚫고 들어가 어금니 잇몸 사이에 박힌 것을 찾아냈다. 다른 파편 하나는 상의 윗주머니에 들어있던 연필을 부러뜨리고 지나갔으며 약간 큰 크기의 파편은 철모를 구부러뜨렸다. 철모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두부관통으로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길 가에 있는 군단으로 가서 군단장에게 신고하고 그곳을 떠났다. 군단장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 사람아,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네. 속히 완쾌되어 돌아오게.”하며 격려해주셨다.

심한 통증을 참아가며 그날 밤 늦어서야 대구 육군병원에 도착해 입원했다. 도립병원을 징발해 사용하는 중이어서 의료장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간이병원이었다. 의사들이나 간호사들도 민간인 그대로였다. 따라서 부상 장병들의 무질서는 가히 가관이었다. 나에게는 부상치료도 급했지만 다른 부상병들을 위해 원내 군기와 질서를 먼저 확립해야겠다고 다짐했고 수일 후에는 실제로 병원 내의 질서가 잡혔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장교로 임명되어 군기가 더욱 확립되었으나 낙동강까지 남하한 적을 피해 병원을 철수해야했다. 경남 온산 면으로 이동한 병원은 초등학교 교실에 가마니를 깔고 부상병을 수용했다.

9월 초에 부상을 당해 입원할 당시까지 병약한 몸으로도 기특할 정도로 잘 견디어냈다. 2개월 남짓 야전생활을 하면서 얼굴도 변했다. 머리가 길게 자라고 수염도 덥수룩했고 피부는 햇빛에 그을려 흑인 못지않게 거무스름한 몰골이었다.

입원하고 이삼일이 지나자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다. 병원 부속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깔끔하게 하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담당 간호사가 들어왔다가 그대로 나가더니 잠시 후 담당의사와 의정장교, 간호장교가 몰려왔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누구냐?”며 입을 모아 묻더니 “이 방에 있던 임 중령님은 어디로 가셨냐?”고 다그쳤다. 나는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모르겠다고 했더니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얼마 후 돌아온 당번병이 나를 알아보고 그제야 모두들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털보 사나이가 말끔한 미남(?)으로 변신해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때 나의 주치의가 서 씨 성을 가진 의사였다. 그는 그곳에서 임관한 후 여러 부대를 돌다가 내가 19연대장으로 있을 때 나의 연대 의무대장으로 왔고 계급도 대위로 진급되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2개월여를 그야말로 밀고 밀리는 격전 속에서 지내면서도 가끔은 가족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이 가족생각에 잠기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나 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부상을 당해 병상에 누워있는 처지에서는 가족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리라. 나의 고향도 이미 적지가 되어버렸다. 그곳에 계시던 부모님과 어린 형제들은 또 대전에 있던 아내와 어린 자식들은 어찌 되었는지 걱정스러웠지만 알아볼 길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무사할 것이라도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제주도나 여순사건 때도 군경가족들이 일순위로 학살당하지 않았던가. 가족의 생사가 절망적이라는 판단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이제부터 나에게는 그 무엇도 거리낄 것이 없으니 맘껏 싸우고 싸우다 죽자.’하는 전율마저 느껴졌다.

영특한 연락병 민 하사가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더니 돌아왔다. 대단히 기쁜 소식을 가지고 말이다. 나의 가족들 모두가 건재하다는 소식이었다. 부산 8사단 가족수용소에 수용되어있으며 숙식에도 어려움이 없다고 했다. 꿈이 아니면 기적이었을 것이다. 노인과 어린 것들이 교통편도 없이 무슨 수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부터 부산까지 갈 수 있었을까? 나는 민 하사를 다그쳤다. “전해들은 말이냐? 아니면 네가 직접 내 가족을 만난 것이냐?”하고 물으니 그는 내 가족을 직접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아버님의 친필편지를 꺼내주었다.

편지에 따르면 아버지는 천신만고를 겪으며 마산으로 가 그곳에서 8사단에 수용되어 부산까지 가게 되셨다. 나는 부산으로 달려가려고 했으나 주치의가 허락을 하지 않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상처가 덜 아물어 상체의 움직임이 부자유스러웠다. 며칠 후 아내와 큰 딸이 나를 찾아왔다. 그 얼굴에는 고생의 흔적이 뚜렷했고 몸도 수척해있었다. 대가족을 이끌고 머나먼 피난길을 가느라 심신의 고생이 막심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사지에서 빠져나온 남편을 확인하겠다고 교통편도 없는 곳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깊은 감사와 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전쟁은 시작에 불과했다. 북진통일까지 앞으로 길고도 험난한 길이 남아있었다. 나의 6.25 전쟁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7. 부상 입원

약 40일 만에 상처는 아물었으나 엑스선 등의 의료장비가 없어 심장부근에 박힌 파편은 꺼내지 못했다. 김일성의 파편은 지금도 내 심장 가까이에 들어있다.

병원에서 퇴원해 부산까지 밀려 내려간 육군본부에 가 신고를 하고 보직을 당부했다. 그곳에서 당시 참모총장이던 정일권 장군을 만났다. 그는 나더러 그동안 지리산을 비롯해 전투만 계속 했으니 이제는 후방근무도 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쟁 중인데 군인이 어찌 후방에서 몸을 도사리고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전선으로 보내줄 것을 강조했다.

다음날 인사국 보임과에 갔는데 내가 육군본부 내 모 처 과장으로 내정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슬그머니 담배 케이스가 달린 미제 존슨 라이터를 보임과장에게 건네며 전방의 원대로 복귀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담배 케이스에 양담배를 가득 담더니 나에게 돌려주며 염려 말라고 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함께 식당으로 갔다. 그는 “남들은 후방으로 나오게 해달라고 뇌물을 쓰는데 당신은 어째서 전방으로 가겠다고 뇌물을 쓰냐?”고 물었다. 그러나 상부에서 결정한 일이라 과장의 힘으로는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정된 자리는 좋은 자리였다. 나는 다시 참모차장인 유승렬 장군에게 가서 부탁했다. 이 분이 전쟁 초기에 3사단장으로 나의 직속상관이었음은 앞에서 설명했다. 유 장군은 총장과 다시 상의해보겠다며 총장실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정일권 총장은 그의 특유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의 원대는 이미 없어졌으니 갈수가 없으나 굳이 원한다면 2군단으로 가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보직이 다시 결정되고 며칠 여유가 있어 가족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나의 가족들은 8사단 정병부의 도움으로 해운대 어느 여관 이층에 큰 방을 하나 빌려 양친과 동생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식량과 생활비까지 지원되어 최저한도의 생활은 유지하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부모님과 동생, 처자식 모두와 함께 지내게 되어 부상당한 일이 불행 중 다행인 일이기도 했다. 객지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 학교에도 못 가고 있는 자식들을 보고 있자니 민망하기까지 했다. 하루 빨리 적을 몰아내고 승전고를 울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더욱 강해졌다.

부모님은 그 사이 더 늙으신 듯 했다. 아버님은 사단 정병부에서 배급되는 양담배를 피우시며 고향 걱정에 마음이 편하지 않으신 듯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의 수평선을 한 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아이들이 미군병사가 주었다며 초콜릿 등을 한 아름 들고 왔다. 그 당시 미군병사들은 껌이나 초콜릿 등을 길바닥에 늘어놓고 아이들이 주우러 몰려들면 사진을 찍어대곤 했다. 심히 굴욕적인 일이었으나 있는 자와 굶주린 자의 차이였고 정신문명이 미개한 민족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혹시라도 땅바닥에서 주워온 것이 아닌지 해서 다그쳐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내려다보이는 창밖에 흑인하사관이 한 명 서있었다. 그 사람이 준 것이라고 했다. 무심코 내려가 보니 그는 나의 중령 계급장을 향해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며 유창한 한국말로 자기는 KMAG(군사고문단) 소속인데 며칠 후 한국인 여자와 미국으로 돌아가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말했다. 그에게 축하한다는 말은 했지만 그의 아내 될 여자가 거리의 여자가 아니기를 내심 바랐고 이왕 결혼하는 거라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에 부산 시내에 나가보았다. 그곳에서 고향사람들도 여러 명 만날 수 있었다. 그중 한 청년은 특별히 잘난 인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고 반면 다른 친구의 경우는 낮에는 잘 돌아다니지도 못한다고 했다. 전자는 일명 <요원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 모 처에서 필요로 하는 요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징집에서 면제되지만 요원증이 없는 후자는 징병관에게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군대로 끌려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산의 풍경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다방이나 술집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 듯 했고 곳곳에 군작업복을 입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 당시에는 군작업복을 입고 있지 않으면 행세도 못했다고 한다. 뒷골목에서는 원색적으로 화장을 한 여자들과 군작업복을 입은 자들이 한데 뒤엉겨 춤을 추고 있었다. 누구는 일선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누구는 무슨 특권으로 군작업복 속에 숨어 행락을 누리고 있는 것인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요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틈타 축재를 한 무리들이 접대부를 무릎에 앉히고 고급양주병을 기울이며 희희낙락하고 있는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오호라 이 나라 이 민족이 끝장이라도 나려는 게 아닌가. 하늘을 우러러 통탄을 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사회를 좀먹고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양상은 그 뿐이 아니었다. 건달들의 횡포와 사기꾼들의 난립 등 그 예를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부산 토박이들의 인심이 야박한 것은 사회문제로까지 발전되었다. 피난민들을 도와줄 생각을 하기는커녕 지하에서 길어 올리는 우물물 한 방울도 나누어먹으려 하지 않았다. 낙동강 교두보를 살짝만 열어 공비들이 부산에 들어오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부산토박이들의 행태가 얄미웠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온산 병원에 있을 때 일이다. 그 당시 병력보충이 있어 각 면에서 장정들을 증모했었다. 온산면에서 증모한 장정이 열한명이어서 한 명이 남았다. 징병관은 그 남은 사람에게 당신은 다음에 다시 오라는 말만 하고 열 명만 인솔해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그 남겨진 청년은 한사코 대열을 쫒아갔다. 비록 삼베적삼 차림의 농사꾼처럼 보이는 청년이었지만 M1 소총을 잡고 빨갱이를 죽이겠다는 신념이 강했다.

우리는 결코 지지 않는다는 나의 필승의 신념이 이곳에도 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우리 군이 낙동강까지 밀리는 상황에 처하기는 했지만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필승의 신념이 모두에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신념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준 원동력이라고 나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으며 오늘의 모든 사람들도 늘 이런 신념을 가지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휴가날짜가 하루 남았는데도 그곳 부산을 떠나서 2군단에 부임했다.

18. 부연대장

2군단에 도착하니 유재흥 씨가 군단장으로 있었다. 우리말솜씨가 여전히 서툰 그였지만 나를 무척 반겼다. 나는 8사단 10연대 부연대장으로 보직되었다. 당시 우리 또래의 보직으로는 파격적이었다. 10연대 대대장은 전에 이리 3연대 대대장이던 고근홍 대령이었다. 그 역시 매우 반기며 자기를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지휘관으로 마음껏 싸우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으나 이 전쟁이 2,3일 만에 끝나는 것도 아닐 것이므로 참고 견디자고 마음을 다지고 유재흥 군단장의 말을 상기했다. “부연대장은 인원파악을 잘 하고 병사들이 제대로 먹고 입으며 탄약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지를 늘 잘 살피라.”는 말이었다.

연대장 고 대령은 매우 용감하고 기량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흠이 있다면 부하를 호되게 다룬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당시 무질서한 후퇴를 방지하기 위해 각급 지휘관에게 명령 없이 후퇴하는 장병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로 인한 부작용도 더러 있었다.

고 대령도 소대장 한 사람을 즉결 처분했다는 것이다. 그 명령은 수일 후에 철회되었다. 내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동래에 계신 이시영 부통령을 방문했을 때 즉결 처분 권한이 많은 역효과를 야기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었다. 부통령께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그와 같은 명령권은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하셨다고 한다. 이 내용은 부통령의 비서로부터 전해 들어 기억하고 있다. 자칫하면 불명예스럽게 횡사할 수 있는 심각한 일을 나의 건의로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니 큰 보람을 느끼면서 조부님 생각도 했다. 조부님의 은덕이 없었다면 일개 장교가 한 나라의 부통령을 방문하고 그런 건의를 올릴 수 있었겠는가. “할아버님,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영천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 우리 연대는 승승장구로 적을 격파추격해서 영주 죽영을 탈환하고 단양까지 진격했다. 전방 고지로부터는 여전히 치열한 사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적은 패배했지만 요소마다 숨어서 완강히 저항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남은 포탄이 있는지 포탄도 제법 날아왔다. ‘해가 지기 전에는 격퇴하겠지.’ 하며 인솔한 후방제대의 보급품을 점검하고 저녁 급식을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길가 주막집 마루에 걸터앉아 늦가을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헐렁한 작업복에 M1 총을 멘 보충병(신병)들이 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들이 오늘 저녁이라도 전투부대에 투입되면 대포밥이 되고 말겠지 하는 생각이 그들이 측은해보이기도 했지만 장하고 굳센 용사로도 보였다. 마음속으로 그들의 장도를 빌어주었다. 얄팍한 감회에 잠겨있는데 “형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정신이 들어 옆을 보니 우리 집안 8촌 되는 D군이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한 그 역시 헐렁한 작업복과 발에 맞지 않는 헝겊군화 차림에 총을 멘 채 나를 보는 모습이 가련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내 앞을 지나간 병사들을 나는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D 군을 보는 순간 그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내 머리를 스쳐갔다. 우선 군번과 소속을 물어보고 대열로 돌아가라고 했다. 천우신조라고 하는 말이 이럴 때 해당되는가. 마루에 놓여있는 야전전화기를 들으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저쪽에서 먼저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내가 막 부르려고 했던 사람의 소리였다. 그는 나와 육사 동기이자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신에게 감사하며 그에게 부탁을 했더니 그는 흔쾌히 승낙하며 D군을 나의 부대로 배속명령을 내리겠으니 데리고 가라고 했다.

나는 급히 그를 뒤쫓아 가 인솔 장교에게 인수증을 써주고 D군을 데려왔다. D군은 금융기관 출신이어서 연대 경리반에서 근무하게 했다. 그 일은 공사를 혼돈한 일이기에 자책감도 들었으나 그 당시에는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었고 아마도 ‘핏줄에 대한 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 연대는 선전분투 끝에 원주 횡성을 거쳐 서울로 진입했다. 지나오는 길에 둘러본 원주는 변두리 촌락 농가들과 도립병원 건물만 남아있었다. 나머지 건물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있었다.

연대는 서울 동부에 있는 모 중학교에 주둔했다. 38선을 넘느냐 못 넘느냐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당장이라도 돌파하고 싶은 38선이지만 높은 분들이 결정할 일이었다. 우선 장병들의 휴식공간을 얻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때마침 가수 이난영 씨 일행이 찾아와 장병들을 위문해주었다. 그들도 은신을 하느라 몹시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다. 약간의 식량과 사례금을 주었더니 먼 훗날까지도 잊지 않고 고마워했다.

3일 후 계속 진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사기충천한 장병들은 그 즉시 출동하여 당일로 연천을 거쳐 철원으로 진입했다. 지나가는 동안 곳곳에서 환영인파가 길을 메우고 있어 차가 지나가지 어려울 정도였다. 가식이 없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영이었다. 언제 장만했는지 크고 작은 크기의 태극기가 온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길가에서는 낙오된 인민군 병사들이 차를 태워달라고 애원하는 한편 그들이 약탈한 병기 등을 숨겨둔 장소를 알려주기도 했다. 높은 산이 있는 지역에서는 머리와 수염으로 얼굴이 덮인 청년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공산당을 피하여 산중에 숨어있던 애국자들이었다. 이들은 우리를 위해 길안내도 하고 그 지방에 숨어있는 적정도 잘 알아내어 작전에 공헌했다. 그리고 미처 피하지 못한 공산당 골수분자 색출에도 적극적이었다.

우리는 묘향산 근처까지 진출했다. 특별히 기록될 만한 전투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잠시 이곳에서 진격이 멈추었고 이름 모를 작은 촌락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한 밤중에 사단에서 전화연락이 왔다. 내용은 부연대장 임익순 중령이 19연대 연대장으로 보임되었으니 명일 10시까지 군단에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고근홍 연대장은 수차례에 걸쳐 보류를 청했으나 허사였다. 나 역시 고 대령이 부사단장으로 영전한 후에 그 연대를 인계 받아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밤중이었는데 연대장은 어디서 구했는지 야전식과 토주 한 잔을 차려놓고 참모들과 함께 고별식을 해주었다.
19. 술, 담배 그리고 도박

나의 일생동안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경험이 단 한 번 있다. 아마 보통학교 4학년 때라고 기억된다. 그 해도 하기방학이 되어 조모님을 뵐 겸 숙부님 댁을 방문했다. 증조부님이 경영하시는 양조장에서 술을 담그다가 그만 실수를 해서 단술이 되었던 일이다. 나와 동갑나기인 당고모와 둘이서 몰래 술창고로 숨어들어가 단술을 바가지로 퍼서 마셨다. 달콤하고 얼얼한 맛이 입맛에 맞았는지 연거푸 마시고 숙부님 댁으로 돌아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그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에 없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곯아떨어진 것은 고모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몇 시간은 족히 잔 것 같았다. 어두워져서야 정신이 들었다.

겁이 많으신 할머니가 찬물찜질에 부채질에 야단법석을 부리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눈을 뜨니 숙모님은 북어로 끓인 술국을 가져다주셨다. 몹시 갈증이 난 상태였는데 뜨끈한 국물을 마시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이것이 나의 음주역사 제1호이자 시초였다. 고향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께 꾸중을 들었지만 부친께서는 오히려 “사내놈이 술도 더러 마셔야지.” 두둔하시며 이 녀석은 술로 망신당할 일은 만들지 않을 것이니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고 어머니를 말리셨다.

그 후로는 술과 관련된 사건은 없었으나 19살 때였던 것 같다. 친구가 경영하는 잡화점에서 소주를 잔으로 팔고 있었다. 소주 한 잔에 박하사탕 두 개를 안주로 주었다. 작은 잔은 3전, 큰 잔은 5전이었다. 또래들이 모여서 호기심에 3전짜리 한 잔씩 마셔보았다. 씁쓸하고 독특한 맛과 역겨운 냄새가 그리 좋지 않았다. 잠시 후 얼굴이 화끈거리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지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3잔까지는 마시는 게 주도라 했던가? 서너 잔을 마시고 나니 이제는 눈이 빙빙 도는 듯 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겨우 집 앞까지는 왔지만 부모님께 들킬까 염려되어 정신이 바짝 드는 것 같았다.

아버님은 원래 술을 못하시는 건지 안 하시는 건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약주를 드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싸리문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니 부모님은 안 계셨다. 나는 소리 내지 않고 내방으로 들어가 창문 밑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잠을 잤다. 술은 배울 때부터 조심해야 다음에도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술을 마시면 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나는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때문에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이 없다. 혹시 술이 생겨도 누군가와 함께 마시지 않으면 1년이든 2년이든 그대로 있다. 그러나 공식석상이나 연회자리에서는 기꺼이 즐겨 마시지만 실수를 하는 일은 없었다. 아버님 말씀이 옳았고 어머님의 걱정은 기우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가까운 분 중 세 분이 술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실이 있다. 그 한 사람이 증조부님 재산을 물려받은 종조부님이시다. 술과 노름으로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하고 선산기슭의 초가삼간에 몸을 의지하다가 실명까지 하셨는데 결국 회갑도 못 넘기고 작고하셨다. 두 번째 사람은 나의 재종매부 되는 안성 사람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왔고 그 부친은 안성 유지였으며 중고등 학교도 창설하시고 사업체도 여러 개 가지고 계셨다. 학벌도 좋고 집안도 좋아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고 벼르던 친구였는데 그도 역시 술이 과해서 간경화증으로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요절했다. 세 번째 사람은 바로 외숙부님이시다. 셋째 외숙이시며 내가 어릴 적 나를 가장 사랑해주시던 분이었다. 가정을 이루었으나 자식을 여럿 잃으시고 사업도 변변치 않아지자 점점 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종말에는 식사는 아예 끊으시고 소주로만 사셨다고 한다. 그 분도 심장마비로 작고하셨다. 남겨진 자식들이 어려서 외숙모의 고생은 형언할 수 없었다.

담배 이야기도 잊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선친께서는 담배를 좋아하셔서 식량이 떨어지는 것보다 담배가 떨어지는 것을 더 걱정하시는 분이었다. 나의 담배역사는 비교적 짧았으나 그 내막은 조금 다르다.

나는 스무 살이 조금 지나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친구와 주거니 받거니 피워도 하루에 스무 개비는 되었다. 그러나 절대로 하급담배는 안 피웠다. 그러던 중 앞서 말한 바 있는 군에 입대해서부터 나의 담배역사에 변화가 왔다. 군대초년병 시절에는 솔직히 담배 피울 시간이라는 게 없다. 숨어서 피우다 적발되면 호되게 기압을 받았다. 그러나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보며 피우면 묵인해주기도 했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은 그 방법을 이용했다. 아침, 점심, 저녁식사를 마치면 습관적으로 화장실로 가 혼자서 담배 맛에 취하곤 했다.

그런데 한 번은 역사적인 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볼 일을 막 마치고 나오는데 화장실 앞에 주번하사관이 몽둥이를 들고 서있었다. 그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나를 붙잡고 “너 이 자식, 그 안에서 뭘 했느냐?”는 것이다. 나는 솔직하게 담배를 피웠다고 대답했다. 그자는 무조건 한 대 치더니 “어느 놈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느냐.”며 인정사정없이 나를 구타했다. 내가 입대한지 7개월 정도 되었는데 아직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지지 못했던 때였다. 구타를 당해서라기보다는 일본 놈에게 굴욕을 당한 것이 참을 수 없이 분했다.

내가 담배만 피우지 않았어도 그런 굴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 분하기만 했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담배를 끊기로 작정했다. 입대할 때 친구들이 준 담배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그것을 같은 내무반 동기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손을 털었다. 담배를 끊는 것이 무척 힘들었으나 참고 견뎠다. 담배를 끊으니 손이나 의복에서 담배냄새가 나지 않아서 좋았고 무엇보다도 도둑담배를 피우느라 긴장하지 않아서 마음이 편했다.

군에서 제대하고 나와서 다시 피울까도 했으나 배급제가 아니었다. 담배 한 갑 사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야했고 담배장사인 일본 놈에게 굽실거려야 했다. 일본 놈들은 줄을 서지 않아도 뒷구멍으로 두세 갑 씩 쉽게 내주었다. 이 역시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그런 아니꼬운 꼴을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계속 금연을 하기로 결심했다.

해방이 되자 금보다 귀하다던 담배가 어디서 쏟아지는지 어딜 가나 담배가 흔해졌다. 그때부터 아쉬움 없이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금연을 했다. 이유는 국토가 분단된 것이었다. 모처럼 되찾은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진 것이다. 분단된 조국의 민족이 무슨 염치로 담배를 피운단 말인가. 하루 세 번 먹는 밥도 한 번이나 두 번으로 줄여야하거늘 담배를 무슨 면목으로 피우겠나 하는 것이 나의 금연에 대한 이유였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났다. 38선이 무너지고 통일이 되면 그때 다시 담배를 피우기로 하고 담배 몇 갑을 차에 싣고 다녔다. 10연대 부연대장 재직 시 동두천과 전곡 사이의 38도 선을 넘을 때 공병이 표시한 38선에서 지프차의 앞바퀴는 북쪽에 뒷바퀴는 남쪽에 세우고 운전병과 전령병과 모두 함께 38선을 걸터앉아 가지고 다니던 담뱃갑을 뜯어 마음껏 담배를 피웠다. 그러나 1.4후퇴 때부터 다시 금연을 하기 시작해 지금 70살이 넘을 때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내가 죽은 후 조국이 민주통일이 되면 저세상에서나마 원 없이 피워보리라.

담배는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힘든 일을 하고나서 심신의 피로를 달래는 수단으로 더러 이용하지만 득이 될 만한 것은 없다. 한번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때마침 가뭄이 계속되는 봄철이어서 잔디가 심하게 말라있었다. 앞에서 달리던 트럭에서 차창으로 버려진 담배꽁초가 잔디로 떨어져 순식간에 불이 붙어 산불로 번졌다. 순간적인 실수로 수십 년간 자란 나무가 일순간에 잿더미가 되는 것을 보았다. 그 원인도 담배였다. 우리나라 화재원인의 30퍼센트 이상이 담뱃불이라는 통계도 나와 있다. 담배의 죄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내가 19연대장으로 있을 때였다. 매월 각 대대에서 근무성적이 좋은 사병을 뽑아 특별휴가를 보내는 제도를 만들어 실천한 일이 있었다. 휴가를 나갈 때는 연대장에게 신고를 하게 했다. 한 병사가 외출용 군용 백에 무엇인가를 가득 담은 듯 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담배라고 했다. 사병이 자기가 피울 담배도 부족할 텐데 무슨 담배를 그리 많이 가지고 있는지 의아했다. 담배가 30갑 정도는 되었는데 그 사병은 이틀에 한 갑씩 배급되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휴가 나가는 길에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리려고 수개월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나는 양담배 두 상자를 더 그의 백에 넣어주고 부친에게 갖다드리라고 했다.

또 한 번은 육사동기 한 사람이 찾아왔다. 얼굴은 검게 그을리고 야위어서 살 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 모진 병에라도 걸린 게 아닌지 걱정이 되어 물었더니 별다른 병은 없고 소화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연거푸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 녀석이 니코틴 중독이구나 싶어 금연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알고 있는 지식을 총 동원해 구체적으로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그는 나의 충고대로 금연을 했다. 6개월 후 다시 만났을 때는 얼굴피부색도 밝아졌고 뺨에는 살도 올라있었다. 그 후로 그는 관운도 좋았는지 승승장구 발전해나갔다. 정부의 모 부서 부차관까지 승진했다. 그는 지금도 나를 만나면 내가 금연을 권한 것에 대해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건재하다.

한 친구는 새해부터 금연한다며 맹세를 했었다. 그 해 봄이 다 지나지 않았을 무렵 어느 날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는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있었다. “금연하겠다고 맹세까지 하더니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가 실토하기를 두세 달 노력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는데 멀뚱멀뚱 상대의 얼굴만 보고 있으려니 쑥스럽기도 하고 겸연쩍어 부득이 담배를 다시 피운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괴변으로 들렸으나 과연 괴변이었을까.

이왕에 이야기가 나왔으니 노름에 대해 회고해본다. 내 나이 열 살쯤 되던 초겨울이었다. 여름방학 때 단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사건이 일어났던 그 해였다. 나는 또래들과 딱지치기에 너무 열중했었는데 담임이셨던 최 선생님과 어머니께서 심히 걱정을 하셨다. 딱지치기를 잘해서 내 주머니는 늘 딱지로 불룩해있었다. 선생님은 벌도 주시고 아이들에게서 딴 딱지를 몰수(?)하기도 하셨고 어머니는 가차 없이 종아리를 때리기도 하셨다. 딱지를 몽땅 빼앗겨도 하루만 다시 놀이를 하면 내 주머니는 다시 가득 차는 재미는 그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는 승리감까지 주었다.

학교 성적도 점차 나빠지고 공부도 하기 싫어졌다. 공부를 하는 게 무의미해졌다. 어머님은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아버님은 오히려 담담해 하시며 ‘철들면 그만 두겠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는 듯 했다. 그러나 어머님은 이런 버릇이 몸에 베이면 장래에 노름꾼이 될 수도 있다고 계속 야단만 치셨다.

하루는 늦게까지 딱지놀이를 하고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님은 안 계시고 어머니 혼자 대바구니에 무엇인가를 담고 계셨다. 나를 보신 어머니는 대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나더러 따라오라고 하셨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 뒤를 따라 갔는데 도착한 곳은 경찰주재소 뒷문이었다. 어머니는 비록 가난해도 양가집 아낙이신지라 문안에 들어서지 않고 거기서부터는 나더러 대바구니를 들고 가라고 하셨다. 아버님이 유치장에 계시니 가져다 드리라는 것이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짐작했다. 대바구니를 들고 유치장 앞까지 간 나는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 하고 불렀다. 캄캄한 유치장 안에 누가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리 읍내는 전기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앞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왜 왔느냐고 물으셨다. 저녁 진지를 가져왔다고 말씀드리니 도로 가져가라고 대답하셨다. 이렇게 차가운 날씨에 유치장 마룻바닥에서 식사도 안 드시면 어떻게 하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가 일러주신 대로 대바구니 바닥을 만져보니 양초토막과 성냥이 손에 잡혔다. 양초에 불을 붙여보니 유치장 안에는 아버님 외에도 두세 사람이 더 있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짐승같이 소리도 없이 어느 사이에 다가왔는지 나의 뒤에서 “이 새끼!”하는 버럭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일본 놈 순사가 험상궂은 얼굴로 서있었다. 그 녀석은 서투른 조선말로 “이 새끼야! 유치장에 불을 지피면 네 놈 아버지가 먼저 타 죽는다!”며 고함을 쳤다. 나는 양촛불을 입으로 불어 끌 틈도 없이 손바닥으로 촛불을 눌러 껐다. 이어서 그 녀석은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물었다. 아버지 저녁식사를 가져왔다고 하니 넣어주라고 했다.

유치장 벽으로 난 조그만 구멍을 통해 밥그릇을 밀어 넣은 다음 반찬그릇을 넣으려고 하니 그 놈이 또 무섭게 소리를 질렀다. 도박을 한 죄인은 반찬을 먹을 수 없어! 라고 눈을 부라리는 듯 했다. 대바구니를 두고 빨리 돌아가라는 그의 재촉에 나는 도망치다시피 뒷문을 빠져나왔다. 어머니는 벌벌 떨며 서 계셨다. 어머니 팔에 매달려서 집으로 돌아오며 사연을 들었다.

그 시대 농촌은 겨울이 되면 농한기가 되어 농사꾼들은 한가했다. 그래서 모이면 담배내기 화투를 재미삼아 하기도 했다. 그날도 5전짜리 담배 한 갑을 걸고 내기를 하셨는데 일본 놈 순사의 눈에 뜨여 모두 잡혀간 것이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식욕도 없어서 그대로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일본 놈들이 즐겨하는 ‘스고로쿠’라고 하는 게임은 5전은 고사하고 50전이나 1원 정도의 큰돈을 걸고서 승부를 겨루는데 조선인들이 농한기에 5전짜리 화투를 한 것이 과연 죄라고 할 수 있는 건지가 의문이었다.

최 선생님은 돈이나 물건을 걸고 화투나 투전을 하는 일은 노름이고, 노름은 국법으로 금하고 있어 이를 범할 경우 벌을 받는다고 하셨다. 아버님께서도 분명 노름을 하셨다. 그리고 나도 날마다 딱지치기라는 노름을 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유치장에 들어가 차가운 마룻방에 앉아 추위에 떨며 소금밥을 먹어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억지로 밥을 조금 먹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추운 감방에 웅크리고 앉아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녘에 스르르 잠이 든 것 같았는데 밖에서 아버님 소리가 나는 듯해서 이불을 걷어차고 나갔다. 아버님이 초췌하신 모습으로 서계셨다. 어머님이 떠다 드린 세숫물에 세수를 하시고 방으로 들어오신 아버님은 최 선생님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아랫목에 누우신 아버님을 보니 밤새도록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목이 메고 콧등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침밥을 대충 먹고 학교에 갔다. 다른 날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어제 나에게 딱지를 많이 잃은 아이들이 몰려와 또 딱지치기를 하자고 했다. 나는 어젯밤에 맹세한대로 이제부터는 딱지치기와 못 치기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나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딱지와 못을 몽땅 꺼내서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나의 행동에 의아스러워 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앞으로 죽는 날까지 절대 이런 놀이를 하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 다시는 딱지치기 하자는 말을 말라.”고 선언했다.

마침 출근하시던 최 선생님이 이 광경을 보시고 나에게 다가오시더니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언젠가는 내가 딱지치기를 그만 둘 것이라고 예상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로는 딱지치기는 물론 지금까지도 화투나 바둑, 마작 등의 놀이는 일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사연이 하나 있다. 맹모삼천 보다 더 위대한 사연이다.

내가 해방 전 야나세 부대에 있을 때 휴가를 나온 일이 있다. 그 때 주재소 순사였던 일본인 오지마 씨를 우연히 만나 서로 옛일을 회고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는 나의 아버님 안부를 물으며 ‘이 세상에 최고의 아버지’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화투도박 혐의로 유치장에 들어가셨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날 오후에 아버님이 그에게 찾아가셨다. 아버님은 나의 딱지놀이가 도를 넘어섰지만 말을 듣지 않으니 나를 노름꾼으로 유치장에 넣어달라고 그에게 부탁을 하셨다. 그러나 혐의도 없이 구금을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자 아버님은 모든 책임을 당신이 지겠다고 하시며 간청을 하셨다. 결국 두 사람은 작전을 짜게 되었고 아버님이 직접 유치장에 갇히는 연출을 하신 것이었다. 그날 밤 순사가 나를 보고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야단을 친 것도 그때서야 이해가 됐다.

나의 도박근성(?)은 아버님의 승고한 부성애와 넘치는 희생정신 덕분에 뿌리가 뽑힌 것이다. 이런 부성애를 어찌 맹모삼천과 비교하지 못하겠는가. 지금은 내가 노령이 되었지만 그 일을 생각하며 열 살배기 소년으로 돌아가 아버님 품에 안겨 울고 싶어진다. 아버님은 운명하시는 순간까지도 그 일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 역시 아버님의 자애롭고 승고한 부성애를 침범하는 것 같아 입 밖에 내지 않았었으나 이 회고록에 기억을 남기고자 한다.
20. 청천강과 38선

낯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2군단을 거쳐 6사단 CP(지휘소)에 도착했다. 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내가 부산을 떠날 때만 해도 육본 정보국장 자리에 있었다. 6사단장으로 부임한지 불과 며칠 되지 않는 병아리 사단장인 것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매우 반기며 “후방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야전사령관은 하면 할수록 어려워진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전임 19연대장 박 중령이 전사했고 부연대장은 중상으로 후송된 상황이니 속히 가서 연대를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5연대 시절 내가 지리산에서 올린 전과로 연대장인 자기가 체면치레가 되었던 것을 또 다시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청천강 물은 푸르다 못해 검푸르렀다. 쪽배를 타고 출렁이는 강물을 건너서 19연대에 도착해보니 사단참모장이 와서 연대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날이 밝아 평안도 구장에서 연대를 인계받았다. 예비대로 빠짐과 동시에 병기와 피복 등이 보충되었고 병력도 보충되었지만 전투경험이 없는 신병들이 대부분이었다. 대대장들은 비교적 선임들이었고 우수한 장교들 같았다.

제1차로 내려진 작전명령은 후방 성천의 광산에 인민군 약 1개 사단의 패잔병이 집결되어있어 우군 진격에 위협이 되니 그들을 포착하여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연대장으로 취임해 첫 번째 작전으로 잔존해있는 공비토벌이라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으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전진하는 우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존재를 깨끗이 소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사단의 전 기동력을 발휘해 그날 오후 해가 질 무렵 정천 읍에 도착했다. 일부 병력은 관산의 후면으로 이동하여 기습공격하게 하고 주력으로 맹공을 가했다. 날이 밝아지자 미군 항공대의 지원이 있었다. 적의 대부분이 섬멸되었다. 패잔공비 몇 명이 달아났고 굴속에 갇혀있던 수많은 양민들이 구출됐다. 규모만 작았을 뿐 지리산 거림리 소탕작전과 전황은 다를 바 없었다.

군대의 꽃이라 불리는 연대장이 된 나로서는 첫 번째 전투에서 성공한 셈이어서 장래에 대한 희망도 밝았고 신의 가호가 함께 하는 듯도 했다. 건빵으로 점심식사를 대신하고 피로도 미처 풀지 못하고 있는데 또 무전연락이 도착했다. 내용은 중공군이 대거 침공해서 전황이 불리하니 연대는 즉시 북창에 집결하라는 명령이었다.

부대를 이끌고 어제 달려온 길을 되돌아 북으로 올라갔다. 밤을 새워 이동하고, 싸웠는데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쉬게도 못해서 장병들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오늘 새벽에 올린 전과는 지금까지 별다른 전과가 없었던 연대의 전 장병들에게 사기를 북돋게 하기에 충분했는지 그 여세로 쉬지 않고 북창까지 진격했다.

도착해보니 얼마 전까지 내가 몸 담았던 우군 10연대가 분산 돼버렸고 고근홍 연대장이 실종되었으며 덕천 터키여단이 완전 포위되고 기타 부대들도 지리멸렬된 상황이었다. 무기도 버린 채 붕대를 감고 삼삼오오 나오는 장병들의 참상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즉시 10연대가 진격하면서 구축했던 북창 북쪽진지로 그대로 진입해 우리 측 낙오병 수습과 반격의 기회를 살폈다. 다음날 새벽 10연대 중대장 한 사람이 중공군 포로 2명을 잡아서 후퇴했다.

그 포로는 해방 전에 내가 만주에서 보았던 노동자들의 행색이었다. 피복도 보잘 것 없고 몸이 말라 영양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무기도 수중에 없었다. 무기는 어디다 두었느냐고 물었더니 지금은 없어도 다른 병사가 전사하면 그 총을 가지게 된다고 대답했다. 그들의 진술에 따르면 중화기는 몇 대 없고 자동화기만 몇 대 가지고 있는 정도였다.

한심한 것은 이런 하찮은 존재들과 싸워서 패하고 쫓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위층에서는 인해전술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막강한 우리의 병장비는 무엇에 사용했단 말인가? 나는 패한 이유가 인해전술 때문이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심리전적인 원인이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낮에는 우리 한국인들로부터 약탈한 하얀색 두루마기와 치마 등을 뒤집어쓰고 눈 속에 엎드린 채 우군의 공중공격을 피하고 있다가 밤이 되면 호루라기와 뿔피리 등을 불고 꽹과리, 징 등을 두들기며 소란을 부린다. 허세를 부리며 자신들의 등 뒤에서 쏘아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려드는 것이 우리 사병들 눈에는 마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이 물 밀 듯이 밀려오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거짓선전을 했다. 호루라기는 분대장이 불고 뿔피리는 소대장이, 꽹과리와 징은 중대장이 치는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기에 우리 병사들은 징소리가 나면 중대병력이 몰려오고 있다고 착각하고 그 소리가 두 곳에서 나면 2개 중대병력이 기습해온다고 겁을 먹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의 수는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체감하는 수보다는 훨씬 적은 숫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높은 분들은 그것이 인해전술이라고 확신했고 그것에 손을 든 것이다. 우리는 손자, 오자병법과 제갈공명의 술수모략 전술에 진 것이었다. 우리 한국군이나 미국군을 비롯해 유엔군은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그 많은 군수품을 몽땅 버리고 남으로 남으로 질서도 정연하게 (당시 언론들의 표현이었다.) 후퇴를 거듭했다.

나의 연대가 북창에 배치되었을 때 6사단은 미군 9군단에 예속되었다. 그로인하여 나의 연대는 미 9군단 산하 유엔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옹호부대 역할을 하며 밀려오는 적을 저지했다. 길마다 골짜기마다 피난민 사이에 섞여있는 중공군을 격퇴하기는 무엇보다 힘들었다.

밤이 되면 물 밀 듯이 몰려오는 중공오랑캐와 싸우고 날이 밝아지면 우군의 공군공격으로 공격을 멈춘 적을 빼돌리면서 다음 방어진지까지 도보행군으로 후퇴를 계속했다. 나의 연대 사병들은 참으로 잘 싸우고 잘 걸어주었다. 낙오자가 한 명도 없었고 동상에 걸리거나 하는 등의 환자도 없었다. 용맹스럽게 싸우고 묵묵히 걸었다. 나는 묵묵히 걷는 그들의 옆으로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 미안해 그들과 함께 걷기도 했다. 한 하사관은 “연대장님, 제발 차로 가주십시오.”라며 간청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소나무 숲속에서 적이 숨겨둔 말린 명태 한 보따리를 발견했다. 이것을 사병들에게 나누어주어 가지고 가며 먹게 했다. 고된 행군도 배가 부르면 피로가 덜하기 때문이다. 명태는 옛날부터 요기가 잘 되는 먹을거리인데다 영양도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대가 행군할 때마다 피난민이 수백 명씩 뒤를 따랐다. 김일성의 공산주의 정치가 좋았다면 이렇게 많은 피난민이 남으로 가겠다고 나서겠는가.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어느덧 평양에 도착했다. 많은 우군이 모여 있었고 시내에는 민간인도 많이 남아있었다.

적의 추격도 조금은 완화된듯했고 우군도 많이 결집되어 있어서 평양 방위는 나의 연대가 전적으로 도맡아서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모처럼 하룻밤을 건물 안에서 쉬게 되었다. 그 때 사단본부가 서평양 도심지에 있었다. 나는 사단장을 방문하려고 그곳으로 갔더니 사단장은 근처에 있는 다방에 있다고 했다. 사단에서 알려준 다방으로 가니 사단참모와 많은 장교들이 거기에 있었다. 용건을 말하고 있노라니 내일이면 떠나야할 다방마담은 부지런히도 움직이며 차를 팔고 있었다. 군군이 평양에 진주하자 고관의 그늘에 숨어서 따라온 다방이라고 했다. 그 이름도 거룩한 ‘서울 다방’이었다. 이러한 상혼이 과연 민주주의라는 것인가? 자본주의라는 것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피를 흘리는 것인가?

한 구석에서는 사단 참모 한 사람이 기생집으로 술을 마시러 가자며 수군댔다. 그들은 중공군이 침입하자 자동차로 이곳에 와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내가 낮에는 싸우고 밤에는 걷는 동안 그들은 기름진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따뜻한 방에서 여자를 끌어안고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연대본부로 돌아와 모처럼 따뜻한 방안에 누워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작렬하는 포탄소리만 자장가처럼 들려오더니 별안간 집이 흔들거리며 가까이에서 폭음이 들렸다. 미군이 집적해놓은 군수품을 폭파 소각하는 소리라고 했다.

12월 대동강 강바람은 매우 차가웠다. 꽤 늦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잠을 청하며 뒤척이고 있었다. 문밖에서 갑자기 사람 소리가 나더니 H라는 분이 찾아왔다고 전했다. 반가웠으나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교통편도 없는 이곳까지 무슨 일로 왔는지 궁금해 하며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을린 얼굴로 그 친구가 방으로 들어왔다. 추위에 얼마나 얼었는지 처음에는 말을 못할 정도였다.

우선 더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게 했더니 잠시 후 정신이 드는 듯 했다. 모진 고생을 하면서까지 찾아온 이유를 물으니 그는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출발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부산에서 이곳까지 15일 만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북쪽으로 가는 19연대라고 표시된 차는 무조건 잡아탔지만 15일이나 걸렸다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유명한 한학자로 작고하신 조부님의 수제자이자 비서였던 매우 점잖은 분이다. 그는 꽁꽁 동여매었던 괴나리봇짐을 풀더니 한약 두 제를 내놓았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4월에 내가 위장병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후에야 들었다는 것이다. 늦기는 했지만 잘 아는 부산의 명의에게서 지은 약이라고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형제도 있고 친척도 있다. 그리고 피난길까지 따라다니면서 얹혀사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이용하고 신세나 지려고 했지 나의 곤경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이 분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최전선까지 나를 찾아온 것이다. 형제나 친척보다도 더 가깝고 절친한 우정이 아니겠는가. 약이 효과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분의 성의가 어찌나 고마운지 피난민 소년을 고용해 전쟁 와중에도 꾸준히 다려 마셨다.

다음날부터 또 다시 전투와 행군이 시작되었다. 남천 시변리를 거쳐 연천에 도착했다. 그곳의 변두리마을인 능소리라는 곳에서 밤새도록 야간공방전을 벌였다. 날이 밝자 모두 연천에 집결했다. 38선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다. 동두천 국도를 접촉점으로 동쪽으로 5,6 킬로미터 되는 지역이었다. 일 개 연대의 병력으로 방어를 하기에는 지역의 범위가 너무 넓었으나 어찌하겠는가. 사변 전에 구축한 진지를 보수하고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대대별로 출발했다. 날이 몹시 추워서 천하가 모두 얼어붙는 듯 했다.

점심식사가 준비되었다기에 빈 집에 들어가 모처럼 밥상에 차린 밥을 먹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을 때지 않았는지 방 안은 몹시 추웠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햇볕이 드는 곳에 앉아 쉬고 있으려니 미군 제트기가 기총소사(비행기에서 목표물을 기관총으로 누비듯이 휘둘러 쏘는 일)를 하며 순식간에 지나갔다.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2,3분 전에 내가 앉아있던 방 안 그 자리에 50밀리 기관포 실탄이 박혀있었다. 방이 따뜻하기라도 해서 내가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살고 죽는 일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적과 싸우다 전사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바라는 바이지만 우군의 오발에 죽는다면 아마 눈도 감지 못할 것이다.

부대배치도 그런대로 완료되었고 적정도 조용해졌다. 날씨도 다소 풀린듯했다. 연대본부 숙소에서 속옷을 갈아입는데 몸이 조금 불어난 느낌이 들어 살펴보니 아랫배가 두툼해져있었다. 입맛이 없었지만 움직이기 위해 억지로 먹던 밥을 최근에는 끼니마다 한 그릇씩 거뜬하게 해치웠다. 위장 기능이 완전히 회복된듯했다. H가 지어다 준 한약 덕분이 아닌가 생각도 했다.

그 날 대대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모두들 안정된 분위기였다. 한 많은 38선. 그리도 당당하고 도도하게 그리고 희망차게 넘었었는데 또 다시 이곳으로 와 들어앉다니 탄식만 나올 뿐이었다.